INSIGHT
쉽고 즐거운 일상 속 ‘참여’가
새로운 기부 문화를 만든다.
2019.05.23
쉽고 즐거운 일상 속 ‘참여’가 새로운 기부 문화를 만든다. 스토리 대표이미지
작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상의 기부 경험
아침 출근길,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을 선택한 당신은 오늘도 걷기 앱을 켜고 출근을 시작한다. 10m마다 포인트가 적립되어 기부되는 앱은 오늘 아침에도 2.5km 거리를 기부했다고 알려준다.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SNS에는 좋아하는 인플루언서가 찍어 올린 텀블러 사진이 보인다. 해시태그는 #플라스틱프리챌린지. 얼마 전부터 자주 보이던 해시태그인데 클릭해보니 게시물만 2만 개가 넘는다. 사무실 동료들의 티타임에서는 지난 주말 시작된 TV 프로그램이 화젯거리다. 연예인들이 인터넷방송으로 기부금을 모으는데, 각자 들고 나온 콘텐츠가 다양해 꽤나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후배는 직접 기부금도 보냈다며 흥분해 목소리를 높인다. 웃고 떠드는 사이 근무시간이 되어 돌아온 책상엔 얼마 전 구입한 반려나무가 당신을 반긴다. 작은 드라세나 화분은 하나를 구입할 때마다 숲에 나무를 두 그루씩심는다는 메시지에 반해 구입했다. 사무실에 한 개, 집에 두 개를 구입해 두었으니 이미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심은 나무가 몇 그루나 있다는 생각에 오늘도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다. 이 가상의 일상 속에서는 과연 몇 번의 기부와 나눔이 일어났을까. 매년 줄어드는 국내 기부 참여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부 방식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기부라고 하면 과거에는 거리 모금함이나 TV 속 자막으로 나오던 자동응답시스템(ARS)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최근 통계는 전통적 방식의 현금 기부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통계청이 발표한 국내 기부 참여율은 2011년 36.4%에서 2017년 26.7%로, 6년간 9.7% 감소했다. 기부 참여가 줄어드는 이유로 경기둔화에 따른 현금 기부에 대한 부담과 함께 연이은 비리 스캔들로 기부 단체에 쌓인 불신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한 변화의 움직임은 새로운 희망을 갖기에 충분하다. 경험과 공감에 기반한 새로운 기부 문화, 사회적 가치와 재미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나눔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 SNS, 애플리케이션, 블록체인과 같은 IT 플랫폼과 기술이 결합하며 앱을 사용하거나 새로운 소비 기준을 세우는 것만으로 기부를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확산되고 있다. 재미(Fun)와 기부(Donation)를 합친 ‘퍼네이션(Funation)’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할 만큼 쉽고 즐거운 기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매년 빠른 속도로 감소하는 현금 기부에도
불구하고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기부와 나눔 활동이 새로운 기부
문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함께 도전하고, 스스로 펀딩하는 기부 문화
변화의 기폭제는 스마트폰과 SNS였다. 2014년 시작된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전 세계적으로 1억 달러가 넘는 모금에 성공했다. 얼음물을 채운 양동이를 뒤집어쓰며 근육이 수축하는 루게릭병 환자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메시지도 효과적이었지만, 참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목하는 확산 방식이 탁월했다. 특히 빌게이츠, 오프라 윈프리 등 유명 셀러브리티들의 참여가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SNS를 기반으로 한 기부 챌린지는 다양한 아이디어로 확산되었다. 세계자연기금(WWF)과 제주패스가 2018년 11월 시작한 ‘플라스틱 프리 챌린지’는 불과 몇 달 만에 목표 참가자 수 2만 명을 넘어섰다. 텀블러 사진을 찍은 뒤 해시태그를 달아 인증샷을 올리면 1건당 1,000원이 적립된다. 캠페인을 통해 모은 수익금은 제주도 환경보전 활동과 세계자연기금 등에 쓰일 예정이다. 접근성이 높은 스마트폰이나 SNS를 활용한 기부 방식은 생활 밀착형 기부로 불릴 만큼 기부에 대한 문턱을 낮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루 한 번 기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유기 동물에게 10g의 사료를 기부할 수 있고(올라펫), 광고를 시청하는 것만으로 포인트를 쌓아 기부하고(애플트리), 앱을 켜고 걷기만 해도 포인트를 적립해 장애아동을 위한 의족이나 소방관을 위한 장갑을 사는 데 기부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빅워크)도 있다. 검색을 하는 것만으로 나무 심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검색엔진도 있다. 에코시아(www.ecosia.org)는 인터넷 사용자에게 네이버나 구글처럼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고 광고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세계 곳곳에 나무를 심는다. 현재까지 검색의 힘으로 5,470만 그루의 나무를 자연에 돌려주었다. 단순히 SNS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만으로 변화가 시작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수의 관심이 ‘다수의 참여’로 이어지면 기업·정부·지자체의 자원을 끌어들여 문제 해결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관심이 ‘참여’로 이어지는 데에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의 역할도 컸다. 작고 사소한 아이디어도 대중이 원하는 사회적 가치와 공감대를 형성하면 큰 파급력을 지닌 프로젝트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기부자의 심리와 대상 지역,
세대 문화를 고려한 기부 콘텐츠
다양한 기부 콘텐츠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지만, 트렌드에 민감한 아이디어는 그 파급력만큼이나 수명이 짧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유행에 편승한 일회성 캠페인이 아니라 기부자의 심리와 대상 지역, 세대 문화에 기반한 기부 콘텐츠가 주목받는 이유다. 제3세계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해온 독일의 미제레오르(Misereor)는 유럽 내 기부자의 40%가 신용 카드로 기부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기부를 위한 옥외광고 ‘더 소셜 스와이프(The Social Swipe)’를 설치했다. 공항에 설치한 이 옥외광고는 두 개의 디스플레이 사이에 신용카드를 긁으면 한 덩어리였던 빵이 나뉘고, 손을 묶은 밧줄이 잘리며 2유로의 기부금이 결제된다. 바쁜 일상 속에서 간편하게 기부를 하면서 기부금이 어떤 일에 쓰이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설치하고 한 달 동안 3,000유로가 기부되고, 3회 이상 참여한 기부자 비율이 전년도에 비해 23% 증가했다. 음식을 매개체로 한 세계 각국의 기부 캠페인은 지역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사례다. 일본 비영리기관 테이블 포 투(Table for Two)는 2017년부터 매년 10월 16일 세계 식량의 날을 기념해 ‘오니기리 액션(Onigiri Action)’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오니기리를 만들어 먹는 사진을 #onigiriaction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올리면 건당 100엔이 기부되는 방식으로, 캠페인을 통해 조성한기금은 아프리카 등 빈곤국 아동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데 쓰인다. 현재 두 번의 캠페인을 통해 인스타그램에만 25만 개의 게시물이 게재될 만큼 큰 파급력을 자랑한다. 폴란드 적십자에서 펼친 ‘베리 굿 매너(Very Good Manner)’ 캠페인은 포크와 나이프를 놓는 서양식 테이블 매너를 응용했다.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이 접시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적십자를 상징하는 십자가 모양으로 놓으면 기부하겠다는 뜻이며, 계산서에 자연스럽게 5PLN(약 1,500원)이 추가되어 청구된다. 프로젝트를 론칭한 후 기부금이 65% 증가하는 성과를 얻었다. 국내의 경우 젊은 세대의 다이어트 문화에서 공감대를 찾은 기부 방법도 있다. 소셜 벤처 내살네쌀은 다이어트를 통한 쌀 기부라는 아이디어로 출발했다. 참여자가 자신이 빼고 싶은 몸무게만큼의 쌀값을 내살네쌀에 보증금으로 입금한 후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돈을 돌려주고내살네쌀이 쌀을 구매해 기부한다. 물론 실패하면 보증금으로 쌀을 구매해 참여자 이름으로 기부하는 조건이다.
새로운 기부 문화를 위한 고민과 과제
2018년 10월 발표된 세계기부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부 참여 지수는 OECD 35개국 중 21위, 전체 조사 대상 139개국 중 62위에 그쳤다. 국내 기부 문화에 변화가 필요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리 좋은 기부 아이디어도 일회성 이벤트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기부를 결심하게 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해답의 실마리는 인크루트와 아르바이트 O2O 플랫폼 알바콜의 ‘2018년 기부 경험 설문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기부를 왜 하는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들은 ‘수혜자에게 온정을 전하고 싶어서(21.5%)’, ‘좋은 일을 했다는 기분을 얻고 싶어서(21.1%)’, ‘기부 과정에서 얻는 행복이 커서 (19.9%)’ 순으로 답했다. ‘경제적으로 감당되는 범위여서(16%)’, ‘소득공제에 유리해서(5.2%)’라는 답변은 소수에 머물렀다. 많은 이가 심리적 만족감을 기부 동기로 꼽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다수의 참여를 끌어낼 기부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가치는 물론 기부자의 자아실현과 자기만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이를 위해 재능 기부, 지식 기부, 간접 기부, 소비 기부 등 새로운 기부 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또 참여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다양한 리워드를 고민하고, 기부자들 간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기부 결심을 방해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기부를 하지 않는 이유로 ‘기부금 사용처가 투명하지 않아서’라는 응답이 60.7%로 1위를 차지했다. 또 기부를 한 사람조차도 61.7%가 자신의 기부금이 제대로 쓰였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최근 자선 분야에서는 기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는 사례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자선단체인 피델리티자선기금(Fidelity Charitable)은 2017년 암호화폐를 통해 6,900만 달러의 기부금을 모았고,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은 시리아 난민에게 암호화된 140만 달러 상당의 식량 쿠폰을 블록체인 기술로 제공했다. 블록체인은 데이터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통해 기부 현황은 물론 기부금과 기부 물품 전달의 모든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솔루션으로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SIT 일곱 번째 모임에서는 이처럼 새로운 기부 문화를 위해 사회곳곳에서 시작된 변화의 움직임을 주목했다. 발상의 전환으로 봉사의 개념을 바꾸고,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소셜 이노베이터들의 사례를 통해 궁극적으로 신뢰, 참여, 기부, 확산이 선순환되는 새로운 기부 생태계의 미래를 상상해본다.